[역경의 열매] 김덕호 (23) 전 재산 털어 서울 변두리에 병원 개원
- 작성일2009/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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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돌아오자 해외에서 강연과 교류 요청이 더욱 늘어났다. 교환교수로 와 달라고 요청하는 곳도 있었다.
나는 꿈에 부풀었다. 새로운 논문을 써서 외국에 들고 나가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당시에는 학술진흥원 지원이 적었고, 국가적 연구 지원 제도도 부족했다. 총장님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희대 총장실을 찾아갔다.
“총장님. 지금 전 세계가 한국의 한의학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잠을 자고 있습니다. 경희대 한의대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은 펜대뿐입니다. 무균 실험실도 없어 서울대나 과학기술원의 실험실을 빌려 쓰는 형편입니다. 그것도 모두 제 돈을 들여 실험을 했습니다. 무균 실험실은 국제적인 논문을 쓰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시설입니다. 도와주십시오.”
나는 큰 액수의 연구비를 요청했다. 학교에서는 차일피일 미루었다. 꿈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자존심도 상했다. 당시 강남의 30평 아파트 값이 3000만원 정도 하던 때였다. 내가 요청한 2억원은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40억원이 넘는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교수가 당돌하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학교에 계속 있어 봐야 무슨 비전이 있겠는가.’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나가 개원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후일을 도모하며 기다릴 것인가. 주변에서는 개원을 말렸다. 1년여를 기도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30대의 10년을 학교에서 후회 없이 보냈다. 이제 40대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 개원하면 돈을 벌어 학술 활동과 선교 활동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해 온 거여동과 마천동(거마) 지역에서 개업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당시 이곳은 달동네였다. 아내도 여기에 교회를 개척했으니 부부가 힘을 모아 하나님의 일에 힘쓰는 것이 더 보람 있겠다고 판단했다.
오래 전에 사 둔 농지가 개발구역에 편입되면서 대신 받은 땅이 이곳에 있었다. 큰 도로변에서 들어간 주택가였다. 여기에 건물을 짓고 교회와 한의원을 함께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잘나가는 교수로 있다가 나왔으니 의료장비도 최대한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퇴직금을 비롯해 내 전 재산을 그곳에 쏟아부었다. 빚도 끌어들여 92년 오금동에 5층 건물을 완공하고 영생한의원을 개원했다.
자신이 있었다. 문만 열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학교의 요청으로 1주일에 이틀씩 강의를 나가다 보니 진료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 오후 4∼5시간을 무료 진료에 할애하니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병원을 찾아온 사람들도 한마디씩 했다.
“도로변에서 보이지도 않는 이런 구석진 곳에 한의원을 차려 놓았으니 누가 오겠어?”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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