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덕호 (21) 아내의 뜻 받아들여 교회 개척 결심
- 작성일2009/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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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에게 화를 냈다.
“꼭 목사가 돼 교회를 개척하겠다면 당신 마음대로 해. 대신 난 아무런 관심을 안 가질 테니.”
아무리 얘기해도 아내는 교회를 개척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내 상황은 다급했다. 간계 내과학 교과서와 영문 서적을 출간한 뒤 일이 더 많아지고 바빠졌다. 한의대의 발전을 위해 연구지원을 확충하는 문제를 두고 학교와 논의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교회에서는 성가대원 대학부장 봉사단의 일로 쉽게 떠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제안했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자.”
그러는 중에 아내는 당시 철거민 지역인 서울 둔촌동에 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몬테소리 유치원을 열었다. 거기서 부모들과 함께 소그룹으로 예배를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갈등이 깊어지면서 급기야 이혼 얘기까지 나왔다.
만약 가정예배가 없었다면 위기가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 6개월쯤 되었을 때, 말씀을 읽는 중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하나 더 세워 선교와 지역 봉사를 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교회를 개척하라는 응답을 확실하게 받았어?”
“그래요. 확실해요.”
아내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참사랑교회(예사랑교회로 개명)의 시작이었다.
교회 개척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 중에 전인순 권사님이 계셨다. 내가 대학시절부터 다니던 성문교회 성도로 인정 많고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다. 89년 늦가을쯤 퇴근 시간이 넘어 전 권사님이 응급실에 실려왔다. 검사를 해보니 암 수치가 높았다. 배를 열기로 했으나 이미 늦었다고 결론이 났다.
남편 박순호씨는 당시 백령도 우체국장으로 있었다. 높은 풍랑으로 헬기도 뜰 수 없어 1주일이나 지나서야 도착했다.
“박사님, 저 사람 너무 착한 사람입니다. 차라리 나 같은 놈에게 몹쓸병이 생길 것이지….”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의학적으로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양방 항암요법과 녹용 삼칠근 등 한약 처방과 특수침술, 뜸술 등을 동원해 면역력을 증강하는 한방치료를 함께 시행해보기로 했다. 나는 권사님의 남편에게 말했다.
“박 국장님, 권사님의 마지막 바람은 국장님이 교회에 나가 예수 믿고 세례 받는 것인 줄 아십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열심히 나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라고 다그쳤다. 3개월쯤 됐을 때 갑자기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지고 폐렴까지 겹쳤다. 나도 기도하며 박 국장에게 알렸다.
“이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