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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덕호 (10) 교회 완공 기뻤지만 학비 걱정에 막막
    • 작성일2009/11/13 00:00
    • 조회 11,427
    발을 헛디뎌 떨어지던 나는 2층의 지지대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공사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달려왔다. 얼굴과 무릎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당시 성곡교회 건축에는 온 성도들이 헌신했다. 특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각오는 남달랐다. 할아버지는 한의원 수입을 모두 교회 건축을 위해 드렸고 1년의 공사 기간 동안 인부들의 새참을 도맡아 부담하셨다.

    여기엔 할아버지의 개인적인 부담감도 작용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강요받았을 때, 할아버지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 바람에 서당도 문을 닫았고, 교회도 큰 어려움을 당했다. 일제는 교회 종을 떼어 가고 고등계 형사를 보내 일일이 감시했다.

    할아버지는, 비록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교회에 어려움을 준 것을 늘 마음의 빚으로 생각했다. 그런 부담을 씻기 위해 건축에 더 열심을 내셨던 것 같다.

    묘한 것은, 할아버지에게 그토록 불만이 많았던 나도 교회 건축에는 찬성을 했던 점이다. 내 학비와 용돈을 내가 마련하는 것이 교회 건축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주말마다 교회 건축 현장으로 달려가 흙짐을 졌는데, 내가 크게 다쳤다면 교회에서도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3층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를 가벼운 부상으로 넘긴 것은 나 자신은 물론이고 여러 모로 다행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이라 믿는다.

    교회가 완공되던 날 할아버지는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나도 북받쳐 오르는 가슴을 누르며 뜨겁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교회 건축 때문에 집안에 손을 내밀지 못했지만, 사실 등록금을 마련하는 일은 내게 큰 부담이었다. 교회에서 흙짐을 질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선 등록금 걱정, 생활비 걱정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2학기 때에는 고등학생 2명을 과외하면서 등록비와 생활비를 간신히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학과공부는 더 어려워질 것이니 계속 과외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교회 건축이나 주일학교 봉사, 성가대 일을 빠질 수도 없었다. 주일성수는 어릴 때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고 배웠으니 그날은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고민이 커졌다.

    하루는 학과장이신 강효신 교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김덕호군, 다음학기 등록금은 마련이 됐는가?”

    “아직 마련이 안 돼 사실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

    “김군은 성적이 좋으니 성적장학금을 탈 수 있겠네. 충분하진 않아도 등록금 절반 정도는 될 것이야. 그리고 이번에 마침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에 우리 학과 학생을 1명 추천해달라고 요청이 왔네. 5·16장학금이라면 등록금을 다 내고도 남지.”

    “예? 정말입니까? 저를 5·16장학생으로 추천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5·16장학금은 자네 선배인 민병일군과 자네 중 1명만 받을 수 있네. 김군과 민군 둘이 협의해서 결정해야 하네. 성적장학금과 5·16장학금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내일까지 생각해보고 답을 해 주게나.”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