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덕호 (1) 3대째 한의사 집안… 30만명 무료 진료
- 작성일2009/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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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을 낯설어 할 국민일보 독자들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5개의 인애가한방병원과 시립노인전문병원, 사회복지법인 장수마을의 3개 노인복지시설을 운영하며 500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 경영인이라고 해야 할까. 3대째 한의사를 하고 있는 집안에서 30만명을 무료 진료하고 지금도 1주일에 6일을 진료하는 한의사라고 하는 것이 내게 더 가까울까. 목사를 8명 배출하고 30명의 장로가 있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뼛속까지 기독교인인 사람이라고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런 것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그저 상처 많고 허물 많은 한 사람의 죄인이자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은 인간일 뿐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내세울 것은 별로 없고 오히려 털어 놓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 많은 인생이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살아계심을 조금이나마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한다. 나는 경북 영주시 장수면 성곡리에서 자랐다. 성곡리는 ‘별고을’이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별 볼일밖에 없는 두메산골이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산쪽으로 제일 가까운 외딴집이었다. 무려 120여년 전에 건축된 기와집이었데, 방만 30칸이 있었다. 산 중턱에서 바라보면 맑은 날에는 멀리 영주 시내 불빛이 은은하게 보였고, 모교회인 성곡교회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교회 장로였던 할아버지는 한의사였다. 할아버지에게 진찰을 받고 약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밤낮 없이 집을 드나들었다. 할아버지는 돈이 없는 환자도 박대하지 않고 동네의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도우셔서 존경을 받았다. 요즘에도 영주에 가면 “김 박사 조부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 정도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새벽 일찍 깨워 성경과 한학을 가르치셨다. 잠이 부족해 눈을 비비기라도 하면 찬물로 세수하고 오라고 내쫓으셨다. 천자문부터 시작해 계몽편 명심보감 고문진보 사략 격몽요결 등을 외워야 했다. 할아버지가 바쁘신 날에는 저녁에 열리는 서당에서 동네 형들 틈에 끼여 앉아서라도 공부했다. 그러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꾸물대면 회초리가 기다린다.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농사일은 끝이 없었다. 더운 여름날 웃통을 벗고 보리타작을 하다보면 까칠까칠한 까끄라기가 온몸에 들러붙어 따갑고 가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똥지게를 지고 가다가 자칫 잘못하면 뒤집어쓰게 된다. 수시로 풀을 뽑아도 돌아서면 잡초가 나 있었다. 때론 약초를 작두로 써는 일도 빠트려선 안됐다. 인생에 첫 시련이 닥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서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어떤 아주머니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는 아버지는 별말을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할머니께 여쭤보았다. “할매, 저 아지매 누군데 엄마하고 저래쌌니껴?” “덕호야, 아지매가 아니고 저 여자도 니 엄마데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약력=경북 영주 출생/경희대 한의대 박사/의료법인 인애가한방병원그룹·인애가사회복지재단 이사장/경희대 부속한방병원 외래교수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